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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군인월급 및 군인 월급 바뀌는 내용(인상안 : 당직수당, 활동비, 수당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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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의 월급이 또한번 급격하게 오를 예정입니다. 2023년에도 군인월급이 급하게 향상될 예정입니다. 이제 막 입대하는 분들에게는 한줄기 희망이기고 하고 일부는 군대가아닌 캠프라는 의견도 있는데 어떻게 생각 하시는지요? 2023년도에는 병장 100만원, 2024년은 150만원이 확정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자세히 소개드리겠습니다.  기존 2022년까지의 군인 월급 변천사는 이전글(링크클릭)을 참고 하시면 좋습니다.  2023년 군인월급 인상안이 예정되고 있습니다. 상당히 가파르게 상승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병의 월급이 51만원에서 75만원으로, 일병의 월급은 55만원에서 86만원으로, 상병의 월급은 61만원에서 90만원으로, 병장의 월급은 67만원에서 100만원으로 오를 수 있다는 예측이 나오고 있는데 이에 따라 일부에서는 너무 과한거 아니냐 라는 의견도 있지만, 아직도 너무 적다, 최저임금도 안된다 라는 이야기도 많은게 사실입니다.    위의 사진이 2023년에 실제 오른 군인 병사 급여인데요 이병은 60만원 병장은 100만원 받는게 결정되었습니다. 실로 파격적인 인상인거 같습니다. 25년까지는 점차 150만원까지 올린다고 합니다. 그외에도 2023년 군인월급 외에도 달라지는 사항들이 많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는데요 여러가지 처우개선이 좋아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습니다.  첫번째로 당직근무비가 상승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군인은 특성상 24시간 근무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특별한 수당이 없이 근무를 시행하다가 당직근무비가 신설 되었었는데 그게 평일 1만원, 휴일 2만원으로 전혀 현실성이 없었습니다. 다만 이번에 조금 향상되어서 조금이나마 처우개선이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평일 : 1만원->3만원   -휴일 : 2만원->6만원    ※ 27년부터 8만원 인상 추진 중 두번째로 시간외 근무수당 지급시간이 향상됩니다. 기존에 28시간만 지급되다가 한시적으로 22년에 45시간까지 확대 적용되고 있는데요. 23년에는 45시간으로

밀리패스로 군인 및 군인가족 혜택, 영외 PX 이용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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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 군인가족이라면 하나의 앱을 통해서 신분증, 휴가증, 출장증, 복무확인서, 급여내역서 등 다양한 증명서를 발급하고 보관할 수 있는 전자지갑 기능과 군 복지관련 내용(자기계발, 쇼핑, 외식, 문화, 숙박 등) 이용한 밀리패스 서비스가 나왔습니다. 군인과 군인가족을 위한 인증서비스로 기존에 소개드린 영외 PX의 경우 군인가족이 더욱 편하게 이용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현역용사의 경우 당연히 가입하여 사용이 가능하고 군인가족도 가입하여 상용이 가능합니다. 간단하게 군인과 군인가족의 편의를 위한 모바링 인증 서비스 입니다.  밀리패스를 어떻게 활용이 가능하고 가입절차는 어떻게 되는지 천천히 소개드리겠습니다.  밀리패스앱 기본화면입니다. 용사들의 경우 신분증, 휴가증, 출장증, 복무확인서, 급여내역서등 기본적인 증명서를 발급, 보관할 수 있고 이를통해 다양한 서비스를 받을 수 있습니다. 특히 부대에 출입할 때는 위병소 출입시 신분증 대용으로도 활용이 가능합니다. 다만, NFC기능을 통한 부대 출입은 모든 부대에 다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 일부부대에서만 이용가능 할 수 있습니다.  밀리패스 앱은 군인 뿐만이아니라 가족들도 이용할 수 있어서 가장큰 혜택은 군 가족들이 부대안이 아닌 부대밖의 PX를 이용 하는데 매우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점이라 생각됩니다. 밀리패스로 군인가족이 쉽게 pX를 이용하는 장점이 가장 큰거 같습니다.  밀리패스 사용방법은 간단합니다. 앱스토어에서 밀리패스를 검색해서 설치하고, 인증하는 매우 익숙한 절차입니다. 다만, 아무나 이용을 할 수는 없고 군인이거나 군인의 직계가족인 경우에 앱을 활용이 가능합니다.  용사의 경우 전역 이후에는 사용이 제한 될 수 있습니다. 물론 병사의 가족들도 마찬가지이겠지요? 이러한 혜택을 계속 받으시려면 용사들을 군대에 말뚝 박게 하는 방법(?)도 있겠습니다. 밀리패스를 이용하여 자식을 군대에 보낸 부모님들은 영외 PX 이용 등을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혜택이 있을 것으로

1944년 3월 13일, 여성독립운동가 김마리아 여사 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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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마리아 여사 1944년 3월 13일, 독립운동가 김마리아 여사가 순국 했다. 황해도 출신인 그녀는 일본 유학 중, '동경 2·8독립선언문'을 국내에 몰래 들여와 교육 및 종교계 지도자들에게 대외상황을 전하며 3.1만세운동의도화선 역할을 했다. 그녀는 3·1운동의 배후자로 체포돼 옥고를 치른 뒤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를 조직하여 임시정부를 지원했고, 미국 유학중이던 1929년에는 여성독립운동단체 '근화회'를 만들어 독립에 대한염원을 이어갔다. 1932년 귀국 후에도 항일 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 하였으나 광복을 눈앞에 두고 고문 후유증으로 순국했다. 도산 안창호선생이 “김마리아와 같은 여성 10명이 있었다면 독립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독립운동사에서 그녀의 비중은 컸다.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여성독립운동가들의 활약상이 재조명 되고 있다. 여성독립운동가를 떠올리면 유관순 열사나 영화에서 본 독립군 저격수 정도였는데, 그동안 묻혀 있던 유공자들을 정부에서 적극 발굴해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국가가 인정한 여성독립운동가는 2019년 기준 서훈을 받은 75명을 포함해 432명 으로 늘어났다. 나라를 빼앗긴 절박한 상황 속에서 나이 어린 여학생과 교사, 기녀, 간호사 등 수많은 여성들이 독립을 위해 외쳤다. 독립운동가의 어머니와 아내들은 임시정부와 광복군 활동을 지원했고, 이들의 구국정신은 6·25전쟁에서 여자 의용군으로 이어졌다. 이처럼 나라를 구하는데 남녀가 따로 없다는 ‘구국의 DNA' 는 이제 우리 국민이 계속 보존하고 계승해 나가야 할 큰 유산이다.

1973년 3월 8일 맹호부대 완전 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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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호부대 1973년 3월 8일, 베트남전에 파병되었던 맹호부대 본진이 대구 공군기지로 개선 했다. 1965년 10월 파월된 이후 전투임무를 마치고 8년만에 완전철수 한 것이다. 이날 대구 공군기지에는 국방장관과 주한유엔군사령관 등 한·미 고위장성과 가족, 대구시민, 학생 등 수천 명이 참석하여 이들의 개선을 환영했다. 12일 뒤인 20일에는 맹호·백마·십자성 부대 등 전체 주월 국군장병의 귀국을 환영하는 국민환영대회가 대통령과 정부요인, 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운동장에서 열렸고, 장병들은 을지로에서 아현동 로터리까지 시가행진을 펼쳤다. 파병 기간 동안 그들은 한국군의 기상과 용맹함을 전 세계에 과시 하였으며, 그들의 희생과 헌신은 조국 근대화와 국가발전의 기틀이 됐다. 맹호부대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맹호부대장 겸 주월 한국군사령관을 지낸 채명신 장군 이다. 그는 공비토벌작전, 6·25전쟁, 베트남전에 참전하는 등 건국 이후 전투경험이 가장 많은 야전 군인이었다. 특히 부하들을 친형제처럼 아끼고 보살피는 '골육지정'의 리더십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의 인본주의적 가치관은 베트남전에서 민간에 대한 인식과 대처에서도 나타났다. "한국군은 백 명의 베트콩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한 명의 양민은 보호한다." 는 지휘방침을 세워 베트콩과 양민을 분리하는 조치를 내린 것이다. 이처럼 그는 지장, 용장을 넘어 인간에 대한 존중과 겸손, 그리고 배려심을 지닌 덕장이었다. 생전에 전장에서 죽어간 부하들을 잊지 못했던 그는 "내 전우, 부하들의 곁에 나를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결국 장군묘역 대신 1평 남짓한 사병묘역에 안장 됐다. 그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부하들과 함께 했던 것이다. 맹호용사들의 용맹과 지휘관 채명신 장군이 보여준 숭고한 정신은 군인들이 나가야 할 승리의 방향을 정확하게 제시해 준 사례였다.

1883년 3월 6일 고종이 태극기를 국기로 제정·공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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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 1883년 3월 6일, 고종이 태극기를 국기로 제정·공포했다. 일본에 수신사로 가던 박영효가 배 위에서 태극 도형과 4괘(건, 곤, 감, 이)를 그려 넣은 태극기를 공식 국기로 승인한 것이다. 제작방법을 구체적으 로 명시하지 않아 모양은 제각각이지만, 독립운동가들이 현지에서 만들어 가슴에 품었던 피로 얼룩진 태극기들을 보면 여전히 아리다. 국기는 국화, 국가 등과 더불어 국가를 상징 한다. 특히 그중에서도 국기는 국가대표의 트레이드마크다. 운동선수들은 태극마크를 달기 위해 피땀 어린 노력을 하며, 국가대표가 되는 것을 대단한 자부심으로, 영광으로 생각한다. 2015년부터 국군장병들도 군복에 태극기를 부착 하고 있다. 그 전에는 세계평화유지활동을 위해 파병될 때, 즉 국가를 대표하여 해외로 나가는 경우에 한해 태극기를 제복에 달았다. 국가가 대한민국 군인에게 태극기를 부착하도록 한 까닭은 국가대표로서의 자부심과 사명감을 가지고 근무하라는 의미 일 것이다.  1920년대 독립군은 태극기에 황·적·녹색 천을 덧대어 군기로 사용했고, 6·25전쟁 당시 선배 전우들은 압록강을 비롯한 승리의 현장 에서 태극기를 높이 휘날렸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이 땅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 태극기를 가슴에 품고 목숨 바쳐 싸웠고, 또 죽어서는 태극기를 덮고 영면했다. 이처럼 태극기는 전장에서 사력을 다해 싸웠던 우리의 영웅들, 국가대표 군인들의 자랑스러운 상징 이다.

1895년 3월 3일 리지웨이 장군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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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지웨이 장군* 1895년 3월 3일 리지웨이 장군이 출생 했다. 6·25전쟁 중 수류탄을 항상 트레이드마크처럼 달고 다녔던 그에게 어느 기자가 물었다. “가슴에 달고 있는 수류탄은 패튼 장군의 진주 손잡이가 달린 권총처럼 멋있게 사진을 찍기 위한 쇼입니까?" 그러자 리지웨이는 “아닙니다. 이 수류탄은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공수사단을 이끌며 수류탄을 지닌 병사는 위기 상황에서 손쉽게 빠져나올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6·25전쟁에서도 결코 포로가 되거나 매복에 당하지 않겠다는 일념 으로 수류탄을 소지하고 다녔던 것이다.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며 전장을 수없이 누비고 다녔던 리지웨이 장군을 '뼛속까지 군인' 이라 평가했던 이유였다. 6·25전쟁이 발발 하자 그는 맥아더 장군의 부름을 받고 한국으로 달려왔다. 지프 전복 사고로 사망한 워커 장군을 대신해 급작스럽게 미8군 지휘권을 맡게 된 그는 부임과 동시에 맥아더 사령관에게 달려가 부대운용에 대한 전권을 받고 우수한 장교를 과감히 선발해 대대와 연대 지휘관의 소임을 맡겼다. 중공군의 2차 공세에 미군과 유엔군이 힘없이 철수하는 모습에 크게 분노한 그는 연합군의 패배의식을 극복하고 부대의 사기를 올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오직 승리뿐이라 여기고 공세적인 작전을 계획했다.  또한, 예하 지휘관들에게 “항상 전투가 가장 치열한 곳에 지휘관이 먼저 위치하라. "고 강조하면서 그 자신부터 최전선 참호에 수류탄을 달고 나타나 “오늘 밤만 더 버텨 달라."고 부하들을 격려하고 다녔다. 그의 이러한 리더십에 힘입어 국군과 유엔군은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중공군의 공세를 막아내고 38도 선까지 전선을 다시 북상시킬 수 있었다. 리지웨이 장군은 “지휘관이란 결정적인 시점에 전선에 위치해 통찰력을 바탕으로 즉각적인 대응을 지시할 수 있어야 하며, 장병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1233년 2월 26일, 몽골군이 금나라의 수도 카이펑(개봉)을 공성전 끝에 함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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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성전 1233년 2월 26일, 몽골군이 금나라의 수도 카이펑(개봉)을 함락 했다. 1206년 몽골을 통일한 칭기즈칸은 1211년 부족 최고회의에서 금나라 공격을 결정한다. 당시 금나라는 수도 연경(베이징)을 중심으로 세력을 키워 거란족의 요나라와 한족의 송나라를 굴복시킨 당대 최강의 국가였다. 몽골은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금나라 등 주변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풍족한 땅을 손에 넣을 필요가 있었기에 이 충돌은 예견된 것이었다. 칭기즈칸은 원정에 앞서 서하와 위구르 등 북방민족을 쳐서 후방의 위협을 제거했고 금나라가 성에 들어가 방어할 것이라는 정보를 확보한 뒤 이에 대비한 공성훈련과 전술 에 힘을 쏟았다. 수년간에 걸친 원정 준비가 완료되자 칭기즈칸은 최소한의 수비대만 남긴 채 전 병력을 이끌고 출정했다.  금나라는 수도를 카이펑으로 옮기고 연경에서 농성하였으나 몽골군의 집요한 공격 앞에 1214년 함락되고 말았다. 연경이 무너지자 대세가 몽골로 기울었음을 직감한 북방 여러 민족들이 금나라와 단절했고, 몽골군은 금 황제의 목마장을 습격하여 수십만 마리의 군마를 노획함으로써 전력을 더욱 크게 증강할 수 있었다. 다급해진 금나라는 엄 청난 배상금과 함께 화의를 제시 했고 공성전에서 확실한 성공을 보장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몽골도 이를 수용했다. 이후 휴식과 정비를 마친 몽골군은 1232년 4월 8일 조약 위반을 구실로 삼아 개봉을 다시 공격했고 당시 금나라 전역에서 모인 100여만 명이 총력을 다해 개봉성을 수비했지만 몽골군의 집요한 공성 전술 앞에 군량이 바닥나고 황제가 성을 버리자 결국 함락되고 말았다. 몽골군은 잘 알려진 대로 기병 중심의 군사조직 이었다. 압도적인 기동력으로 적을 집중공격하여 무너뜨리는 것이 강점이었지만 반대로 견고한 성이나 방어물을 잘 극복하지 못했다. 그러나 몽골은 자신들의약점을 빨리 인정하고 이를 보완하기 위해 이민족 군대와 전술을 적극 받아들였다. 정면돌파가 필요할 땐 퉁구스계 중장기

1978년 2월 20일 이집트 특수부대 '알 사이카'에서 777부대로 바꿔서도 실패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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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7부대 1978년 2월 20일 이집트 특수부대 '알 사이카'가 키프로스에서 대테러 작전 에 나섰다. 하지만 창설된 지 1년밖에 되지 않은 특수부대의 첫 실전은 시작부터 어긋나고 있었다. 이들을 태운 수송기가 사전 협조 없이 공항에 무단으로 착륙하자 키프로스군과 경찰이 사이카 부대를 테러범으로 오인하고 발포를 시작했던 것이다. 이 교전으로 부대원과 인질을 포함하여 15명이 사망 했으며 테러범들은 유유히 현장을 빠져나와 키프로스 군에 투항해 버렸다.  체면을 구긴 사이카 부대는 이후 777부대로 명칭을 바꾸고 미국 델타포스를 초청 하여 부대의 면모를 일신하려 애썼다. 그리고 실패를 설욕할 기회는 7년 만에 찾아왔다. 1985년 11월 23일, 110명을 태운 이집트 항공 소속 여객기가 몰타에서 테러리스트에게 납치당하는 사건 이 벌어진 것이다. 이번에는 몰타 정부로부터 작전 개시를 사전에 승인받고 현장에 도착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이들은 기체 내 테러리스트의 숫자와 위치, 항공기 내부구조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 하지만 자신감과 흥분에 들떠있던 지휘관은 기체 위로 올라가 폭약을 설치하고 내부로 진입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폭약량을 과도하게 계산하는 바람에 폭발과 함께 아래에 있던 수십 명의 승객이 즉사 하고 말았다. 게다가 폭발로 인해 시야가 흐려지자 90초 동안이나 대기하며 테러범들이 응전할 시간을 벌어주었다. 여기에 진입을 시작한 부대원들은 섬광탄 대신에 파편 수류탄을 던지는 실수를 저질렀으며 흥분한 상태로 기체 내에서 움직이는 모든 것에 총을 쏘아 수많은 인질을 죽이고 말았다. 이날의 참사로 사망자 57명을 포함해 90여 명이 죽거나 다쳤다 . 물론 여러 과장된 평가도 있는것도 사실입니다.  적군이든 아군이든 적군을 모두 파괘한다라는 부대로 알려진 777부대에 대한 사실은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여러가지 시사점을 가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777부대는 1차 키프로

1952년 2월 6일,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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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2세 1952년 2월 6일,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즉위 하였다. 1926년 4월 21일 런던에서 태어난 이왕은 2020년 영국 역사상 가장 장수한 군주이자 가장 긴 재위 기간 을 가지고 있다. 1939년, 엘리자베스 2세가 열세 살이 되던 해에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프랑스 전역을 석권한 나치 독일은 막대한 공군력을 투입하여 영국을 위협했지만, 어머니 엘리자베스 여왕은 어린 엘리자베스 2세를 국외로 피난시키지 않고 끝까지 남게 함으로써 왕실의 모범을 보였다.  어머니의 이러한 결단과 언행을 보고 자란 엘리자베스 2세 역시 18살이 되면서부터 아버지(조지 6세)에게 군에 입대 해 최전선에서 싸울 기회를 달라고 고집을부렸고 우여곡절 끝에 소위 계급으로 참전하여 군수품 운반 트럭을 모는 임무 를 맡게 된다. 그녀는 다른 장병들과 똑같은 군복을 입고 무거운 탄약을 날랐으며, 차가 고장 나면 먼지와 기름때를 뒤집어쓰고 차량을 수리했다. 이로써 영국 왕실이 참전을 통해 국가에 봉사해온 역사 는 조지 6세(제1차 세계대전, 해군)로부터 계속해서 이어질 수 있었고, 장남인 찰스 왕세자(해군 장교), 둘째 앤드루 왕자(헬기 조종사), 셋째 에드워드(해병대 장교), 그리고 그의 손자 윌리엄(헬기 조종사)과 해리 왕자(아프간 파병, 전투소대장)가 왕실의 전통을 지켜오고 있다. 그리고 영국은 왕실을 중심으로 두 차례의 세계대전 속에서도 굳건히 나라를 보전했으며 엘리자베스 2세는 영국인들에게 '마음의 여왕'(Queen of Heart) 이 될 수 있었다. 영국은 일찍이 1625년 청교도 혁명을 통해 찰스 1세를 몰아냈고 명예혁명을 통해서 제임스 2세를 축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영국인들은 왕을 인정하고 그 권위에 대해 존경을 표하고 있다. 장래 여왕의 자리에 오르게 될 후계자가 국난에 맞서 자발적으로 국가 에 헌신하고자 했던 마음 이 국민의 마음에 닿아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금

1986년 1월 28일 챌린저호 폭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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챌린저호 1986년 1월 28일, 미국의 우주왕복선 챌린저호가 발사대를 떠난 지 73초 만에 공중에서 폭발 했다. 당시 우주 비행사로 선발된 고등학교 교사가 탑승했던 관계로 많은 사람들이 TV로 발사 장면을 시청하고 있었다. 때문에, 챌린저호 폭발 사고의 충격은 실로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사고 후 몇 달간에 걸친 사고 조사결과 한파 때문에 보조로켓 구성품 중 연결 부위의 기밀(을 담당하는 고무링(O-ring)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고 그 벌어진 틈 사이로 새어나간 화염이 우주왕복선 폭발로 이어졌음이 밝혀졌다. 하지만 일차적인 사고조사 이후 밝혀진 사고가 발생하기까지의 과정은 더욱 기막힌 것이었다.  온도 저하에따라 고무링이 발생시킬 수 있는 문제점 에 대해서 엔지니어들이 꾸준히 이의를 제기했음에도 최종 의사결정 과정에서 관련위험이 무시된 것이다. 실제 챌린저호 발사 당일 플로리다는 영하 2℃의 한파가 몰아쳤고 경험 많은 엔지니 어들은 이 정도 온도에서 고무링이 제대로 작동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구심을 갖고 NASA관계자들에게 경고를 보냈다. 그러나 미션 책임자들은 오히려 발사용 로켓 외벽에 보이는 얼음제거에만 신경을 썼고 엔지니어들이 문제를 계속 제기하자 나중에는 이들을 빼고 최종 발사 협의를 진행해 발사에 큰 문제가 없다는 결정을 내려 버렸다. 이미 발사가 여러 차례 미루어진 상태여서 더 이상 발사를 미루는 것이 곤란하다는 이유 였다. 챌린저호는 재활용 가능한 획기적인 우주선으로 이미 25번째 미션을 수행 중이었고 그들은 작은 고무부품 하나가 거대한 우주선을 날려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챌린저호 사고는 막을 수도 있었던 인재 였다. 주어진 목표와 성과에 급급해 현장 전문가의 의견을 귀담아듣지도 충분히 검토하지도 못했다. 지금 내가 속한 조직은 구성원들과 제대로 소통되고 있는지, 또그러한 제도적이고 문화적인 환경 속에 놓여 있는지 챌린저호의 사고를 거울삼아 다시 한번 되짚어 보기는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3단뛰기 세계 신기록은 18.29m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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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는 3단뛰기 세계신기록 이 인터넷에서 화제입니다. 아직도 1995년(1995.08.07.) 스웨덴의 예테보리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서 나온 영국의 조나단 에드워즈선수의 18.29m가 현재 삼단뛰기 세계신기록입니다. 움짤을 보고 있으면 무협지에서 나오는 경공술을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실제 뛰는 모습을 보면 한걸음에 거의 6미터를 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도약장면 보시지요 정말 역동적입니다. 뭔가 속이 시원시원하게 달리고, 뛰는게 아니리 정말 공중에서 날아다니는거 같습니다. 도약하는 부분부터 정말 업청납니다. 24년동안 깨지지 않은 신기록 이라니 정말 엄청난 선수임에 틀림없습니다. 도약부터 뛰끼까지 움짤로 보시면 정말 엄청납니다. 그다음 삼단뛰기 신기록은 언제 어떻게 나오게 될지 정말 궁금합니다. 

1923년 1월 22일, 의열단 단원 독립운동가 김상옥 선생 서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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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김상옥 선생 1923년 1월 22일, 의열단 단원 김상옥 선생이 세상을 떠났다. 열흘 전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의거를 결행한 후 선생은 용산에 있는 매부 고봉근의 집에 몸을 감추었으나 밀고로 인해 은신처가 발각되었고 1월 17일, 무장한 일본 순사 14명에게 완전히 포위당했다. 이에 선생은 뛰어난 사격 솜씨와 대범함으로 이들의 추적을 따돌린 후 눈 덮인 남산을 맨발로 넘어 왕십리 인근 이혜수의 집으로 은거지를 옮겼다. 그러나 이마저 일본에 탐지되어 이번에는 4백여 명의 무장경찰이 은신처를 겹겹이 포위 하기에 이르렀다. 선생은 양손에 권총을 들고 인근 가옥 지붕을 넘나들며 일경과 3시간여의 치열한 접전을 벌여 수 명을 사살하고 다수에게 중상을 입혔지만 안타깝게도 총알이 떨어지고 말았다. 이에 김상옥 선생은 마지막 탄환이 든 권총을 머리에 대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자결 순국 하였다. 그의 나이 34세였다. 상하이를 떠나 면서 남겼다는 "나의 생사가 이번 거사에 달렸소, 만약 실패하면 내세에 만납시다. 나는 자결하여 뜻을 지킬지언정 적의 포로가 되지는 않겠소."라는 그의 결의를 따랐던 것이다. 동아일보는 이 의거를 기사에 올리며 “오른손을 이미 못 쓰는 상태에서 죽는 순간까지 둘째 손가락을 방아쇠에 걸고 권총을 힘있게 잡고 있었다." 라고 했다. 일본 경찰들은 자결한 김 의사가 혹시 살아 있을까 두려워 감히 다가가지 못했고 김 의사의 어머니를 보내 생사를 확인하게 했다. 가족들이 그의 시신을 수습할 때 그의 몸에 11발의 총상 이 남아있었다고 하니 10발의 총알을 맞으면서도 수백의 일경에 맞서 세시간을 버틴 김상옥 의사를 초인으로 생각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선생의 강한 정신력과 결기 넘치는 의거는 우리 민족의 저항정신을 되살렸고 이후 펼쳐지는 항일 투쟁의 발판이 되었다는 역사적 평가를 받고 있다. 독립운동을 다룬 영화 '암살'의 등장인물 '하와

2011년 1월 21일 삼호주얼리호 선원을 구출한 아덴만 여명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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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덴만 여명작전 2011년 1월 21일은 대한민국 해군이 소말리아 해적들에게 납치된 삼호주얼리호의 선원들을 구출한 날이다. 이란의 하르크 섬에서 화물을 싣고 스리랑카로 항해하던 삼호주얼리호는 2011년 1월 15일 인도양 공해상에서 해적들에게 납치되었는데, 당시 배에는 한국인 8명을 포함해 21명의 선원이 타고 있었다. 삼호주얼리호의 피랍 사실을 인지한 대한민국 해군은 청해부대 최영함을 출동시켰고, 1월 18일 1차 구출 작전을 시도했지만 피해자가 발생할 위험이 높아 작전을 중지하고 물러났다. 그리고 계속해서 배를 쫓아 기회를 엿보던 청해부대는 드디어 1월 21일 5시 29분, '아덴만 여명작전'이라고 명명한 2차 구출작전을 단행 하였다. 탑재된 링스헬기와 최영함의 기관총 사격이 적을 제압하며 시선을 끄는 사이, 선박 침투에 성공한 공격조가 신속히 선실에 돌입해 작전을 펼쳤다. 그리고 단 한 명의 작전 요원 손실 없이 피랍된 선원 21명을 구출 하고 삼호주얼리호를 되찾았다. 격실에 숨어있던 잔여 해적까지 모두 소탕한 9시 56분 아덴만 여명작전은 성공적으로 종료 되었다. 위의 기사 사진은 아덴만 여명작전의 흐름을 보여주는데 우리나라 최영함과 작전에 투입된 주요 무기 등에 대해서 보여준다. 아덴만 여명작전은 우리 군이 해외에서 인질로 잡힌 국민을 교전끝에 구출한 최초의 사례 이자 세계적으로도 피랍 상선을 군사작전으로 구출한 다섯 번째 사례였다. 이 작전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무사히 지켜낸 대한민국 해군의 역사적 쾌거로 평가받고 있다. 머나먼 땅에서 국제평화를 위해 노력하는 파병부대원들의 변치 않는 활약 을 기대하며 국민들이 원하는 군 본연의 임무가 무엇인지 알수 있는 사건이다. 

1991년 1월 17일 사막의 폭풍(Desert Storm)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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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의 폭풍작전 1991년 1월 17일, '사막의 폭풍(Desert Storm) '이라는 작전명 아래 이라크 바그다드 공습이 시작됐다. 걸프전의 발발이었다. 이 전쟁은 이라크가 석유 과잉공급과 관련해 갈등을 빚어오던 쿠웨이트를 기습 침공, 점령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은 유엔안보리를 통해 이라크를 침략자로 규정하며 쿠웨이트로부터 즉각 철수할것을 촉구하였고, 1월 15일까지 철군하지 않을 경우 무력을 사용할것임을 경고했다. 그러나 이라크는 이를 거부하였고, 철수기한 이틀뒤, 공습이 시작되었다.  미국이 주도하는 다국적군은 최첨단 무기들을 대거 동원하여 군사 강국이던 이라크를 완전히 압도 했다. 6주간 지속된 이 작전에서 다국적군은 1천여 시간의 공중폭격과 이후 불과 1백시간의 지상작전을 통해 이라크의 항복을 받아냈다. 이라크 공화국수비대는 42개 사단 중 무려 41개 사단이 궤멸 되었으며 민간인 피해자를 포함하여 최대 15만 명에 가까운 희생자를 냈다. 이에 반해 다국제군의 피해는 126명에 불과했다. 세부사항은 아래내용을 더 참고해 주세요 걸프전은 이전까지 치러진 전쟁의 양상과는 확연히 달랐다. 가히 전쟁의 개념을 바꿀만한 현대전의 정접에 선 전쟁이었다. 스텔스기를 비롯한 각종 하이테크 무기들은 가공할 만한 정밀타격 능력을 보여주었다. 놀라운 것은 무기시스템 뿐만이 아니었다. 지상군의 바그다드 진격시에는 '가용부대를 축차 투입하지 말라', '공격 축선은 최소화 하라'는 등 작전의 불문율을 깨뜨린 창의적인 계획들이 실현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전장의 모습들이 실시간 중계되며 전 세계인에게 놀라움과 충격을 전해주었다.  베트남 전쟁 이후 15년간 미국의 깊은 반성과 연구가 이뤄낸 전쟁수행방식의 혁신 이었다. 전쟁의 승리는 대적 필승의 정신력과 함께 기술적, 전략·전술적 우위를 점한 측이 쟁취하게 된다. 현대전을 비롯하여 미래 전

1959년 1월 3일, 알래스카가 미국의 49번째 미국 주로 편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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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1월 3일, 알래스카가 미국의 49번째 주로 편입 되었다. 알래스카는 미국의 50개 주 가운데 면적이 가장 넓다. 원래 이땅의 주인이었던 러시아는 알래스카를 미국에 팔기 전, 알래스카의 효용성을 전략적으로 판단해야만 하는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당시 러시아는 크림전 쟁 패전으로 인한 막대한 전비 부담이 원인이 되어 경제적 압박이 상당한 상대였고 적국이었던 영국이 알래스카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 자칫하다가는 알래스카를 강점당할 수도 있는 처지였다, 그래서 러시아는 이해관계가 상충하지 않는 국기를 물색해 알래스카 매각 협상 에 나섰고 당시 영토확장을 꾀하고 있던 미국이 이에 응했다, 1867년 미국의 월리임 스워드 국무장관이 알래스카를 러시아로부터 720만 달러에 매입하는 조약을 체결 하여 미국의 영토로 귀속시켰다. 매입 당시만 해도 '스워드의 냉장고로 세간의 혹평을 받으며 여론의 따가운 질책까지 이어졌지만 알래스카 매입을 통해 북극과 인접하게 된 미국은 전략적으로 유리한 위지를 선점하게 되었다. 이후 1890년 대 알래스카에 금이 발견되면서 주민들의 정착이 추진되었고 추가적인 조사결과 이곳이 막대한 철광석과 석유의 매장지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알래스카는 인디언 알류트어로 '위대한 땅' 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러시아는 이 위대한 땅의 진정한 가지를 몰랐다. 미국도 알래스카를 개척하고 탐험하면서 그 안에 숨겨진 진주를 발견할 수 있었다. 주변에서 깊이 있게 관심을 두지 않았던 하찮은 것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탐색하며 진정한 나의 보물을 새롭게 발견해 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스티븐 폴 잡스의 추천 명언 28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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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이면 고인이 된지 10년이 되는 고 스티브 잡스의 명언 을 소개 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회자되는데 한번씩 되새기면서 읽어보고 있습니다.  1. 항상 배고프고 갈망하라(Stay Hungry, Stay Foolish)      - 항상 (목표를) 갈망하라. 그리고 항상 무모하라       (새로운 도전을 무서워하지 마라 혹은 새로운 분야에 겁내지 마라) 2. 품질은 양보다 중요합니다. 한 번의 홈런이 두 번의 2루타보다 낫습니다. 3. 시간이 없습니다. 누군가를 위해 당신의 삶을 버리지마세요. 4. 포커스 그룹에 의해 디자인을 결정하긴 대단히 어렵다.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그들에게 제품을 보여주기 이전까지 그들이 무엇을 원해왔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5. 비즈니스를 비틀즈 같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들은 개개인이 다른 사람과 조화를 이뤄 시너지를 이끌어 냈죠. 그게 바로 제가 비즈니스를 보는 방식입니다. 위대한 일은 언제나 다른 사람과 협력해야만 이뤄낼 수 있습니다. 6. "디자인은 어떻게 보이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작동하느냐의 문제다."      -2003년 뉴욕타임스와의 스티븐잡스와의 인터뷰- 7. "대부분 사람은 원하는 것을 보여주기 전까지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른다."      -1998년 비즈니스위크와의 스티븐 폴 잡스의 인터뷰- 8. 당신은 시장에서 사람들을 속일 수 없습니다. 제품이 그들 스스로를 대변하기 때문입니다. 9. 당신이 아름다운 침실용 옷장을 만드는 목수라면 뒷면에 합판을 쓰지 않을 겁니다. 합판은 벽에 가려져 아무도 그 뒷면을 보지 못하지만 당신은 그 옷장에 합판이 들어간 걸 아니까요. 10. 컴퓨터는 인간이 만들어온 것 중 가장 위대한 도구입니다. 컴퓨터는 우리 마음속의 자전거와 같습니다. 11. 당신이 남긴 각각의 꿈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미래의 한 부분이다(Each dream you leave behind is a part of your f

지난 50년간 가장 많이 읽은 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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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0년간 전세계에서 가장 많이 읽고, 많이 팔린 책 은 성경인데요 James Chapman작가는 지난 50 년 동안 각 책이 판매 된 수를 기준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읽은(팔린) 책 목록을 공개 했습니다. 그는 지난 50 년 동안 무려 39 억 부가 팔린 성경이 다른 어떤 책보다 압도적으로 1위로 확인 되었습니다.  디자이너 Jared Fanning은 Chapman의 연구를 기반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읽은 책에 대한 인포 그래픽을 아래 그림과 같이 만들었습니다. 50년간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읽은(팔린) 책 1위 : 성경, 3,900백만부 2. 마오 주석 어록 (마오쩌둥) 3. 해리포터 시리즈 (J.K 롤링) 4. 반지의 제왕 시리즈 (J.R.R 톨킨) 5. 연금술사 (파울로 코엘료) 6. 다빈치코드 (댄 브라운) 7. 트와일라잇 시리즈 (스테파니 메이어) 8.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마가렛 미첼) 9. 놓치고 싶지 않은 나의 꿈 나의 인생 (나폴레온 힐) 10. 안네의 일기 (안네 프랑크) * 위의 인포그래팩 그림은 2012년도에 발표 되었습니다.  성경과 마오 주석 어록은 특수한 경우임을 감안하면 해리포터시리즈, 반지의 제왕이 정말 엄청납니다. 그외에도 연금술사, 다빈치코드도 엄청나게 많이 읽히는 것으로 확인되었고, 전세계적으로도 판타지 소설의 인기를 보여준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이야 우리나라에서도 다른 설명이 필요가 없고 사실 저는 마오 주석 어록 에 대해서는 잘 몰랐는데 위키백과에서는 아래와 같이 마오 주석 어록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 마오 주석 어록 》( 중국어   간체자 :  毛主席语录 ,  병음 :  Máo zhǔxí yǔlù   모주석어록 [ * ] )은 1964년에  중화인민공화국 에서 출판되었다. 서방에서는 ‘작은 빨간 책( 영어 :  The Little Red Book )’이라고 하며,  중화인민공화국 에서는 ‘붉은 보서( 중국어   간체자 :  红宝书 )’이라고도 한다. 이 책은  마오쩌둥  선집 및

일본 소년점프 최고 히트작 6순위와 만화 판매량(2009년 ~ 20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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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일본 소년 점프의 최고 히트작 6개를 소개드리려고 합니다. 단행본 발행순위로 나열하면 일본 소년점프의 메기 히트작 순위는  1. 원피스 : 96권, 4억 7,300만부 2. 드래곤볼 : 42권, 2억 5,000만부 3. 나루토 : 72권, 2억 5,000만부 4. 여기는 잘나가는 파출소 : 200권, 1억 5,700만부    ==> 40년간 연재 / 무휴재 5. 슬램덩크 : 31권, 1억 2,600만부 6. 귀멸의 칼날 : 21권, 1억부  여기는 잘나가는 파출소는 40년간 쉬지 않고 휴재도 없이 연재된게 정말 대단한 만화 입니다. 도라에몽, 바벨2세 등과 같이 정말 오래 연재되는 끝이 없는 만화 중 하나입니다. 귀멸의 칼날은 진짜 짧은 시간에 정말 많은 독자가 생긴 만화로 독보적입니다.  국내 인지도는 낮은 '여기는 잘나가는 파출소'는 여러가지 광범위한 정보가 잘 결합이 되어 있으면서 , 시사 , 경제적인 내용을 자연스럽게 소개하면서 재밌기 때문에 추천드립니다. 대표적인 일본 장수만화로 1976년부터 2016년까지 40년동안 쉬지않고 연재해서 200권으로 완결 되었습니다.  권당으로 보면 드래곤볼이 제일 많이 팔렸다고 볼 수 있고, 원피스랑 나루토는 권수도 많습니다. 이런점에서 보면 비교적(?) 최근 2016년 부터 연재된 귀멸의 칼날이 진짜 반응이 폭발적인 거라 볼 수 있습니다. 귀멸의 칼날은 만화보다 애니매에션도 굉장히 유명해서 애니메이션 영향으로 판매량이 더욱 늘어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이제 단행본이 21권인데 벌써 1억부라 향후 판도를 뒤엎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소년점프는 1968년에 일본에서 연재되기 시작한 소년 취향(?)의 만화 잡지입니다. 한때 500만부이상을 발매하기도 하는 괴물잡지 였지만 요즘은 예전같이만은 않지만 우리나레에서도 인기가 많은 대표적인 일본 만화 잡지 입니다.  요즘 같이 방콕이 대세인 시기에는 방콕하면서 완결된 만화들 다시 정주행 하는 것도 소확행 중 으뜸 인듯 합니다

사고싶은 인셉션 팽이 ForeverSpin 어른장난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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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어로는 팽이를 Top라고 합니다. 팽이중에서 인셉션의 명장면인 인셉션 팽이가 돌아가는 장면은 아직도 긴 여운을 남기는데 이러한 인셉션 팽이를 파는 곳이 있어서 소개해 드립니다. 팽이 장난감으로 어린이도 좋겠지만 어른이 더 좋아하는 장난감 인듯 합니다. 사무실 책상이나 서재에 놓아도 어울리는 팽이 입니다. 그럼 인셉션에서 소개된 금속팽이 에 대해서 소개해드립니다.  작은 장난감 팽이를 가지고 스트레스를 풀수도 있고 보고 있으면 머리도 환기되면서 새로운 집중력도 생기고 있습니다. 작은 메탈 덩어리 이지만 보고 있으면 미니멀리즘 예술 작품 같기도 하고 어려서 주머니에 넣어 가지고 다지고 싶었던 장난감 같은 느낌도 있습니다. 기본적인 제품 설명입니다. 단순한 팽이인듯 하지만 뭔가 오묘합니다. 캐나다에서 만들어지고 18가지이상의 다양한 금속재질이 있고 CNC 가공을 통해 정밀하게 가공되어 평생동안 보증한다고 합니다. 제조사 홈페이지(클릭) 를 보시면 세부적인 정보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5개를 세트로 판매하는데 정말 사고 싶습니다. 하지만 생각보다 단가가 있어서 쉽게 구매하기에는 부담스러운게 사실입니다. 작은 팽이를 책상에 올려 놓고 만지면서 생산적인 사고에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여러 사람이 있을때 팽이를 돌려서 간단히 점심내기, 간식 내기하는데도 사용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소장품이나 선물용으로도 좋을듯 합니다.  어렸을대 부터 팽이돌리기는 묘한 매력이 있습니다.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뭔가 힐링되는 느낌과 빠져드는 느낌을 느끼게 되는데 영화 인셉션에서 팽이가 나오면서 뭔가 더 특별한 느낌이 생겼습니다. 금속재질 중 티타늄으로 만들어진 것이 가벼우면서 처음 접하는데 제일 좋다고 합니다. 팽이를 만드는 제품 제질중에 휴머니움(Humanium) 메탈 도 있는데 이는 압수한압수한 불법 총기류를 재사용 할 수 없도록 금속으로 녹인 것 으로 수익은 전세계의 평화를 위해 사용된다고 합니다.  5개의 인셉션 팽이와 회전판을 세트 로 놓인 모습입니다. 세트로

수중의 신기한 장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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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중의 신기한 장소들을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여러 세계  곳곳에 있는 바다, 호수, 강 속에는 지상에서는 볼 수 없는 신기한 구조물들이 수중에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난파선이 되어 불가피하게 생성된 것도 있지만, 많은 구조물은 사람들이 인공적으로 물속에서 만든 구조물이거나 건물들인데 이러한 것들을 찾아보는 재미도 있습니다. 그래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물속의 명소들을 몇군데 소개드리려고 합니다.  남미 그레나다의 수중공원 카리브해의 작은 섬나라인 그레나다에 있는 다이빙 포인트로 알려진 수중공원입니다. 그레나다(그라나다, Grenada)는 연영방 군주국 입니다. 그레나다의 몰리네어 베이의 모래바닥에 영국의 조각가 제이슨 테일러가 제작한 조각상들을 설치했는데요. 조각상들은 몰리네어 만의 약 800평방미터 지역에 65개 이상 설치 되어 수중 볼거리를 만들어주고 지역 명소가 되었습니다. 그중 가장 유명한 작품이 아래 사진의 아이들이 손에 손을 잡고 큰원을 만들어 서있는 작품입니다. 이러한 작품들은 스쿠버다이버들에게 손꼽히는 관광명소가 되었습니다.  이탈리아에 있는 바다 속 폼페이 : 바이아 유적 이탈리아 나폴리 서쪽 약 16km 떨어진 바다 속 1700년 전 침수된 고대 도시 바이아가 위치 해 있는데, 바이아는 카이사르, 네로 등 로마 귀족들의 리조트같은 도시였던 곳이다. 지금도 이 바다 안에는 대리석 조각과 모자이크 장식 등이 남아있다.  멕시코 카쿤의 수중박물관 MUSA(Museo Subacuático de Arte) MUSA는 수중 미술 박물관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수심 14m아래에 있는 최초의 미술관이면서 영국 조각가인 제이슨 테일러(Jason de Caires Taylor)의 조각품이 약 400여개의 전시되어 있습니다. 제이슨테일러는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여 살아가는 것이 어떤 모습인지 보여주고 싶어서" 수중 미술관의 조각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멕시코 칸쿤 수중 미술관 MUSA로 인해 해양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사람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