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벨이 군대인 게시물 표시

2023년 군인월급 및 군인 월급 바뀌는 내용(인상안 : 당직수당, 활동비, 수당 등)

이미지
군인의 월급이 또한번 급격하게 오를 예정입니다. 2023년에도 군인월급이 급하게 향상될 예정입니다. 이제 막 입대하는 분들에게는 한줄기 희망이기고 하고 일부는 군대가아닌 캠프라는 의견도 있는데 어떻게 생각 하시는지요? 2023년도에는 병장 100만원, 2024년은 150만원이 확정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자세히 소개드리겠습니다.  기존 2022년까지의 군인 월급 변천사는 이전글(링크클릭)을 참고 하시면 좋습니다.  2023년 군인월급 인상안이 예정되고 있습니다. 상당히 가파르게 상승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병의 월급이 51만원에서 75만원으로, 일병의 월급은 55만원에서 86만원으로, 상병의 월급은 61만원에서 90만원으로, 병장의 월급은 67만원에서 100만원으로 오를 수 있다는 예측이 나오고 있는데 이에 따라 일부에서는 너무 과한거 아니냐 라는 의견도 있지만, 아직도 너무 적다, 최저임금도 안된다 라는 이야기도 많은게 사실입니다.    위의 사진이 2023년에 실제 오른 군인 병사 급여인데요 이병은 60만원 병장은 100만원 받는게 결정되었습니다. 실로 파격적인 인상인거 같습니다. 25년까지는 점차 150만원까지 올린다고 합니다. 그외에도 2023년 군인월급 외에도 달라지는 사항들이 많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는데요 여러가지 처우개선이 좋아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습니다.  첫번째로 당직근무비가 상승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군인은 특성상 24시간 근무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특별한 수당이 없이 근무를 시행하다가 당직근무비가 신설 되었었는데 그게 평일 1만원, 휴일 2만원으로 전혀 현실성이 없었습니다. 다만 이번에 조금 향상되어서 조금이나마 처우개선이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평일 : 1만원->3만원   -휴일 : 2만원->6만원    ※ 27년부터 8만원 인상 추진 중 두번째로 시간외 근무수당 지급시간이 향상됩니다. 기존에 28시간만 지급되다가 한시적으로 22년에 45시간까지 확대 적용되고 있는데요. 23년에는 45시간으로

PX 양주(브랜디) 마제스티XO 가격 및 평가

이미지
PX 관련 상품들 중에 주류를 소개드리고 있는데 이번에 소개드릴 술은 마제스티XO 브랜디 입니다. 군 PX에서 판매되는 양주이지만 면세는 아니고 저렴하게 판매되는 주류입니다. 시중에서는 잘 판매되지 않고 PX 유통되는 제품이라고 보시면 되는데 박스와 포장이 고급스러워서 명절에 선물하거나 특별한날 마시기 위해 판매되고 있습니다.  유명한 브랜디는 대부분 알고 있는 꼬냑지방에 유명하지만 마제스티 XO는 꼬냑은 아니지만 브랜디로 XO급이니 기본 맛과 향은 어느정도 보장하고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 됩니다. 그럼 박스 포장부터 맛과 PX 판매가격까지 천천히 소개드리겠습니다.  커다란 박스에 두개의 잔과 함께 포장되어 있습니다. 내부에 스트레이트잔 두개가 포장을 여는 사람을 설레게 만듭니다. 고급진 모습이고 시중 판매하는 곳은 잘 찾기 힘들지만 8~9만원대에서 시중에서는 구매가 가능하다고 합니다. 다만 PX에서는 42,000원이라는 착한가격으로 구매가 가능 한게 가장 큰 장점입니다. 나무 느낌의 고급진 상자와 금색 천으로 되어 있고 내용물에는 금가루가 일부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진 술입니다. 잔이 귀여우면서 고급스럽고 순금가루가 들어가 있어서 고급진느낌에 포장까지 고급스러워 보이는 장점이 분명합니다. 병을 꺼내본 모습입니다. 병이 고급스럽습니다. 상자가 고급스럽고 단풍모양의 병이 이쁘고 색이 진한것이 전동 브랜디의 맛과 향을 기억하게 합니다. 선물용으로 무난하게 사용하고 친한 지인까리 즐거운 자리에서 마시기 좋은 술 이라 생각됩니다. 40도의 알콜도수를 가지고 있고 XO가 붙은 만큼 프랑스의 브랜디 원액이니 썩어도 준치라고 XO 등급 최소의 맛과 향은 보장할꺼라 생각됩니다.  제품명 : 마제스티 XO(MAJESTY BRANDY X.O) 원산지 : 프랑스 식품의 유형 : 브랜디 업소명 : (주)금양인터네셔날 마제스티XO 표시사항입니다. 프랑스 브랜디 원액을 이용한 술이고 (주) 금양인터내셔날회사에서 유통하고 있습니다. 금양인터네셔날은

육군 전투화 은면전투화와 육면전투화에 대한 비교 분석 및 관리방법

이미지
육군의 전투화가 새로 나왔습니다. 기존의 검은색 전투화에서 최근에 살색전투화로 바뀌었습니다. 갈색 전투화의 정식 명칭는 육면 전투화라고 알려져 있는데요 기존의 전투화와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알려드리겠습니다. 육면전투화란? 육면(肉面, flesh side) 가죽은 Natural grain 가죽으로 엠보싱을 안 찍은 천연상태의 가죽을 말하는데요 가죽의 뒤 측면으로 은면(태, grain side)가죽에 비해 폴리우레탄(PU)가공 등 추가 코팅이 없어 방수, 투습(통기성)이 상대적으로 높습니다. 기존의 검은색 워커가 일반적인 전투화였다면 세무워크 느낌의 전투화로 갈색전투화가 새로 사용되는데 산뜻한 느낌이 강화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기존에 있었던 검은색 전투화(은면전투화)와 육면 전투화의 특징을 비교해보시고, 일반적인 관리 방법도 알아보세요 육면전투화로 바뀌면서 기존 검은색에서 전투복 위장 색상계열로 바꾸면서 야전 위장성 측면에서도 효과적 이라고 합니다. 개선된 기능성 전투화인 육면전투화는 앞코 부분 제거로 무게 감소로 활동성 향상되었고, 전투화의 무게도 265일리 기준(1개) : 은면 677g, 육면 662g으로 -15g 감소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육면 가죽의 특성상 비나 눈에 젖은 경우, 외피 갑피 건조시간이 은면보다 더 오래 걸리는 단점이 있습니다 은연전투화는 기존에 흔히 알려진 검은색의 워커라고 보시면 됩니다. 가죽을 폴리우레탄 가공 처리하여 가죽의 표면이 매끄럽고 염색이 일정한 전투화 인데요 은면가죽은 젖었을 때 마른수건으로 쉽게 닦아낼 수 있는 장점이있습니다. 장기간사용시 접힌부분이나 접합부위가 갈라져서 방수기능이 저하될 수 있습니다. 전투화의 공통적인 손질 방법도 말씀드리겠습니다. 전투화가 젖었을 때는 전투화 안에 신문지나 종이를 넣어 통풍이 잘 되는 그늘에서 말리거나 전투화 건조기 사용시, 40℃ 이내 저온에서 말려야 전투화 모양이 뒤틀리는 것을 예방할 수 있습니다. 고온건조는 불가합니다. 깔창은 중성세제를 푼 미지근한 물에

PX 면세주류 럭스골드넘버24 제품 소개 및 평가

이미지
2021년 면세양주로 추가 판매하는 것으로 선정된 PX면세 주류 럭스골드넘버24(Luxe Gold no.24) 제품을 소개 드리려고 합니다. 군 면세주류는 매년 한번 이상씩 입찰 공고를 내고 새로 선정을 하는데요 새로 추가된 면세주류(위스키) 입니다. 아직 계약이 진행중인 제품으로 영국 스카치 위스키 원액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제품으로 군 PX 면세가격은 29,990원으로 판매될 예정 입니다. 스카치 위스키는 스코틀랜드에서 제조되는 위스키를 말하는데 증류주의 하나로 알코올 성분이 40~45도 주로 몰트 위스키와, 그레인 위스키가 유명합니다. 병에는 england scotch whisky라고 표시되어 있어서 맛이 기대가 되는 제품입니다. NO.24가 의미하는 바가 24년동안 숙성한 것을 말한다면 상당히 고급의 제품을 원액으로 사용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실제 어떠한 맛을 보여줄지 정말 궁금합니다. 정말 24년 이상의 숙성된 위스키라면 상당히 고급스러운 맛일꺼라 생각됩니다.  제품명 : 럭스골드넘버24(LuxeGold No.24) 주종명 : 위스키(양주) 판매업체 : 솔래원 2021년 군납 신상 양주여서 사진확보가 늦었습니다. 실제 사진 및 소개드리겠습니다.  병의 모습이 잭다니엘 허니와 비슷한 모양이 특징이고 맛도 잭다니엘 허니와 유사해서 가성비로는 나쁘지 않습니다. 이제까지 군납 위스키의 최고는 스카치블루21이었는데 조만간 럭스골드넘버24가 비슷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맛은 위스크 고유의 향에 부드러운 풍미와 목넘김이 나쁘지 않습니다. 스카치 위스키의 보편적인 맛이라 보시면 되실듯 합니다.  병뚜껑에도 군납 표시가 확실히 되어 있습니다. 군납 만의 매력을 느끼게 되고 어른들에게 선물하면 왠지 군납이라는 이유만으로 선호하게 되는 그런 느낌아닌 느낌입니다. ^^ 박스포장이 상당히 고급스럽게 되어 있습니다. NO24가 24년을 숙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어서 조금은 아쉽습니다. 병도 고급지고 케

군납 PX 면세주류 : 스카치블루(SCOTCH BLUE)21년산 위스키 가격 및 평가

이미지
군 PX제품 중 면세주류 스카치블루(SCOTCH BLUE) 21 위스키를 소개드리려고 합니다. PX에서 일부 저렴한 술도 팔지만 면세 위스키와 면세 브랜디는 개인별로 할당량이 지정되어 있어서 무한정 살수는 없습니다. 그렇다 보니 군납 면세 양주중에서도 브랜디 XO, 21년산 위스키는 재고가 많이 있지 않을때가 많은데 이번에는 구입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군납 면세 양주_스카치블루 21년산 군납 주류 및 PX에서 구입이 가능한 물품에 대해서 소개드리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군납 양주중 스카치블루 21년산 제품을 소개드리려고 합니다.  2020년 기준 군납 주류 가격표가 궁금하시면 클릭 해주세요   군납 PX 양주_스카치블루 21년산 외부포장 21년산 스카지블루 위스키이고 500mL이며 PX 면세품 가격은 29,120원입니다. 시중에서 스카치블루21년산은 500ml와 700ml짜리 가격이 11만원에서 17만원 사이에 판매되지고, 일반 면세품의 경우 6만원~10만원 선에서도 판매되지만 PX 면세품은 진짜 저렴하게 3만원 이하로 구입이 가능합니다.  군납 PX 양주_스카치블루 21년산 외부포장 박스 옆면의 모습입니다. 당당하게 군납용으로 표시되어 있는게 단점이라면 단점이겠습니다.  제품 표시사항입니다.  식품유형 : 위스키 원재료명 및 함량 : 위스키 원액 100% 원산지 : 영국(스코틀랜드)  * 이 술은 면세 물품이므로 군인이외의 자에게 판매하여서는 아니됩니다.  (위와 같이 표시되어 있지만 군인외에도 군무원 등 도 구매가 가능하긴 합니다.) 군납 양주_스카치블루 21년산 박스 윗부분 PX에서 파는 스카치블루 21년산중에서도 개인별 할당량이 아닌 양주는 면세제품에 비해서 가격이 6~7만원 정도로 두세베 차이가나고, 포장도 위와 같은 단순 박스 포장이 아닌 하드박스에 요란하게 포장되어 있습니다만, 군인(군무원)에게 할당된 양주는 위와같이 간단한 박스 포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아쉬운 부분이지만 저렴한데 더 바라면 안되겠지요? ^^ 군납 양주_Scotch

PX 양주 루이14세 XO 골드 브랜디 가격 및 평가

이미지
PX에서 판매하는 주류를 소개드리고 있는데요 오늘은 프랑스산 브랜디 종류중 하나인 루이14세 XO(Louis XIV brandy XO)를 소개드리려고 합니다. 군납 면세주로 유통되는 몽루아(링크) 는 이전에 소개드렸는데요 면세주는 아니지만 PX에서 저렴하게 유통되기 때문에 또다른 PX 유통 브랜디로 생각보다 찾는 사람이 많은 양주이기도 해서 세부 사항 소개드리겠습니다.  루이14세 양주는 PX에서 판매하지만 면세주류는 아닙니다. 면세주류는 진짜 시중가의 반도 안되는 가격에 판매되는 세금이 전혀 없는 제품이라면 루이14세는 군 PX를 통해서 유통은 되지만 면세는 아니어도 시중 판매가격보다는 매우 저렴하게 판매 되는 제품입니다. 면세 소주나 맥주도 있지만 PX에서 일반 주류도 저렴하게 파는 시스템이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제품에 대한 설명과 PX 판매가격 등 꿀정보 하나씩 설명드리겠습니다.  제품 외부 박스 모습입니다. 종이 박스가 보라색 느낌의 청색으로 고급스럽게 되어 있습니다. 브랜디 종류라소 꼬냑과 같이 포도주를 증류하여 만들었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제품에 따라서 등급을 나누는데 XO 등급이라면 상당히 높은 등급이라고 이해 하셔도 되겠습니다. 다른 제품인 루이13세 술도 있는데 루이13세 술은 수백만원하는 정말 고가의 브랜디이고 루이14세는 전혀 다른 양주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브랜디 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드리면 브랜디 "불에 태운 와인" 이라는 뜻 으로도 알려져 있는데요 와인을 증류시켜 걸러내어 만들어낸 술을 말합니다. 17세기 이후에 프랑스 꼬냑지방은 양조업이 성행하였는데 수출용 와인을 주로 만들다가 운반량을 조금 줄여보려는 의도로 와인을 증류해서 만들었는데 새로운 맛과 향을 가진 술을 만들게 되었고 꼬냑지방은 새로운 술인 브랜디를 최초로 선보인 생산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브랜디중에 꼬냑이 유명한 이유입니다. 브랜디는 와인의 발효가 끝나는 시점에 다시 증류시켜 만들기 때

1910년 3월 26일, 대한의군참모중장 안중근 장군 순국

이미지
안중근 장군 1910년 3월 26일, 대한의군참모중장 안중근 장군이 순국 했다. 하얼빈역에서 민족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1909년 10월 26일)하고 체포된 지 5개월 만이었다. 거사 직후 일본은 안중근 장군을 뤼순 감옥에 수감 하였고, 1910년 2월 7일부터 2월 14일(사형선고일)까지 단 7일 만에 속전속결로 재판을 진행했다. 마지막 공판에서 안중근은 "나는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조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위해서 행한 것이니, 만국공법에 의하여 처리하도록 하라.”라고 의거의 정당함을 밝혔다. 그럼 에도 일제는 국제법을 무시한 채 부당하게 사형을선고했다. 장군의 나이 31세였다. <〈안응칠 역사>와 <동양평화론> 등을 남긴 안중근 장군에게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 되었다. 한국 군대에서는 잘 알려진 '안중근 의사' 대신 '안중근 장군'이라는 호칭을 공식적으로 사용 하고 있다. 2010년 3월, 육군본부가 지휘부 회의실을 '안중근 장군실'로 명명하면서부터. 당시 육군이 항일독립운동사에서 의사로 불리는 대표적인 인물을 장군으로 호칭하게 된 것은 단순히 계급적인 의미보다는 그의 정신을 군인정신의 기본으로 삼으려는 상징성에 무게를 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순국 당일 '대한의군 참모중장'으로서 일본인 간수 치바 도시치에게 적어준 유묵 속에남긴 그의 신념과 의지가 군인의 표상으로 삼을 만한 공통점이 있었던 것이다. '위국헌신 군인본분'(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군인의 본분). 군인에게 이보다 더 본질적이고 숭고한 가치는 없을 것이다.

1973년 3월 8일 맹호부대 완전 철수

이미지
맹호부대 1973년 3월 8일, 베트남전에 파병되었던 맹호부대 본진이 대구 공군기지로 개선 했다. 1965년 10월 파월된 이후 전투임무를 마치고 8년만에 완전철수 한 것이다. 이날 대구 공군기지에는 국방장관과 주한유엔군사령관 등 한·미 고위장성과 가족, 대구시민, 학생 등 수천 명이 참석하여 이들의 개선을 환영했다. 12일 뒤인 20일에는 맹호·백마·십자성 부대 등 전체 주월 국군장병의 귀국을 환영하는 국민환영대회가 대통령과 정부요인, 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운동장에서 열렸고, 장병들은 을지로에서 아현동 로터리까지 시가행진을 펼쳤다. 파병 기간 동안 그들은 한국군의 기상과 용맹함을 전 세계에 과시 하였으며, 그들의 희생과 헌신은 조국 근대화와 국가발전의 기틀이 됐다. 맹호부대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맹호부대장 겸 주월 한국군사령관을 지낸 채명신 장군 이다. 그는 공비토벌작전, 6·25전쟁, 베트남전에 참전하는 등 건국 이후 전투경험이 가장 많은 야전 군인이었다. 특히 부하들을 친형제처럼 아끼고 보살피는 '골육지정'의 리더십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의 인본주의적 가치관은 베트남전에서 민간에 대한 인식과 대처에서도 나타났다. "한국군은 백 명의 베트콩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한 명의 양민은 보호한다." 는 지휘방침을 세워 베트콩과 양민을 분리하는 조치를 내린 것이다. 이처럼 그는 지장, 용장을 넘어 인간에 대한 존중과 겸손, 그리고 배려심을 지닌 덕장이었다. 생전에 전장에서 죽어간 부하들을 잊지 못했던 그는 "내 전우, 부하들의 곁에 나를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결국 장군묘역 대신 1평 남짓한 사병묘역에 안장 됐다. 그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부하들과 함께 했던 것이다. 맹호용사들의 용맹과 지휘관 채명신 장군이 보여준 숭고한 정신은 군인들이 나가야 할 승리의 방향을 정확하게 제시해 준 사례였다.

1883년 3월 6일 고종이 태극기를 국기로 제정·공포

이미지
태극기 1883년 3월 6일, 고종이 태극기를 국기로 제정·공포했다. 일본에 수신사로 가던 박영효가 배 위에서 태극 도형과 4괘(건, 곤, 감, 이)를 그려 넣은 태극기를 공식 국기로 승인한 것이다. 제작방법을 구체적으 로 명시하지 않아 모양은 제각각이지만, 독립운동가들이 현지에서 만들어 가슴에 품었던 피로 얼룩진 태극기들을 보면 여전히 아리다. 국기는 국화, 국가 등과 더불어 국가를 상징 한다. 특히 그중에서도 국기는 국가대표의 트레이드마크다. 운동선수들은 태극마크를 달기 위해 피땀 어린 노력을 하며, 국가대표가 되는 것을 대단한 자부심으로, 영광으로 생각한다. 2015년부터 국군장병들도 군복에 태극기를 부착 하고 있다. 그 전에는 세계평화유지활동을 위해 파병될 때, 즉 국가를 대표하여 해외로 나가는 경우에 한해 태극기를 제복에 달았다. 국가가 대한민국 군인에게 태극기를 부착하도록 한 까닭은 국가대표로서의 자부심과 사명감을 가지고 근무하라는 의미 일 것이다.  1920년대 독립군은 태극기에 황·적·녹색 천을 덧대어 군기로 사용했고, 6·25전쟁 당시 선배 전우들은 압록강을 비롯한 승리의 현장 에서 태극기를 높이 휘날렸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이 땅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 태극기를 가슴에 품고 목숨 바쳐 싸웠고, 또 죽어서는 태극기를 덮고 영면했다. 이처럼 태극기는 전장에서 사력을 다해 싸웠던 우리의 영웅들, 국가대표 군인들의 자랑스러운 상징 이다.

1954년 3월 5일, 우리나라 최초 전투기 조종사 김영환 공군준장 순직

이미지
김영환 준장 1954년 3월 5일, 우리나라 최초의 전투기 조종사 김영환 공군준장이 순직 했다. 이날 그는 10전투비행단 창설 기념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F-51 무스탕을 몰고 사천에서 강릉으로 편대 이동 중 교신 두절과 함께 실종되고 말았다. 당시 갑작스러운 기상악화로 동해상에서 추락했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초대 공군참모총장을 지낸 김정렬 장군의 동생인 그는 1948년 조선경비사관학교 를 나와 국방경비대 중대장과 통위부 정보국장 대리로 근무하면서 공군창설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1951년 8월, 인민군 은거지였던 해인사 일대를 폭격하라는 미국고문단의 명령에 불복하고, 폭격 대신 기관총으로 적 보급창고를 공격하여 팔만대장경 등 국보급 문화유산을 지켜냈다. 그해 9월 강릉전진기지(현 공군18전투비행단)사령관 으로 임명되어 한국공군 최초의 단독출격 작전을 성공적으로 지휘했고, 당시 형수의 붉은 치맛단 자투리 천으로 만들었던 그의 '빨간 마후라는 조종사들의 불타는 투혼을 보여주는 상징 이 되었다. 우리는 대한민국수호와 함께 문화유산을 지켜내고, '빨간 마후라'를 공군의 문화로 선도한 김영환 장군의 창의와 책임감 넘치는 삶에서 조종사들의 헌신 을 엿볼 수 있다. 스크램블(scramble)이라는 말은 전투기가 적기의 기습에 대해 요격할 태세를 갖추어 긴급 발진하는 것을일컫는다. '빨간 마후라'들은 전시는 물론, 평시에도 비상출격 대기, 즉스크램블 상황을 준비하고 있다. 지금 이 시각에도 우리 영토가 평화로운 것은 항시 출동 대기 중인 누군가의 희생이 있기 때문 이다. 지금 내가 맡은 임무에서 스크램블 상황이 발생한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군복입은 군인과 제복입은 경찰, 소방관 등이 항상 고민해야할 숙제다.

병장 월급이 60만원이 넘는다고? 2021년 병사 봉급은 얼마일까?

이미지
2021년 입대하시는 분들은 병 봉급에 대해서 많이 궁금하실텐데요 병장은 무려 얼마전 국방부에서는 병사의 봉급을 2020년 대비 12.5% 인상하였다고 발표 하였습니다. 병역의무 이행자에 대해서 합리적으로(?) 보상하고 국가 책임 강화 차원에서 봉급을 점진적으로 인상할 계획입니다. 과연 그렇다면 부대 내에서면 생활하는 24시간을 모두 근무시간으로 할것인가? 일과 시간인 8시간을 근무시간으로 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 도 아직 남아있습니다. 24시간을 근무시간으로 한다면 최저임금이라도 택도 없는 금액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2021년만 하더라도 병장의 봉급이 608,500원으로 대폭 오르게 됩니다. 병생활 하면서 60만원이 넘는 월급이라니 오래전에 군대 다녀오신 분들은 상상이 되실까요?  그럼 병사들의 봉급의 금액은 어떻게 될까요? 2021년 병사들의 경우 이병은 459,100원, 일병은 496,900원 상병 549,200원 병장 608,500원입니다. 요즘 병사들은 일과이후 월급으로 주식투자 하고 있다는 말이 진짜이기도 합니다. 의식주는 제공하고 있고 코로나19로 외출, 외박, 휴가도 제한하고 있어서 돈 쓸데가 없는 일부 장병들은 주식투자를 하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의무복무하는 병사들의 월급은 얼마까지 올라야 적당할지는 의문입니다만, 일부 예전에 군생활 하셨다는 분들은 현재 많다고 하시는 분들도 있지만 실제 근무하고 있는 분들은 현재 부족하다고 느끼는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현역 병사 및 군인들도 봉급을 이용해서 주식 및 투자를 통해서 쏠쏠한 수익을 내는 분들 도 꽤 많다고 합니다.  그외에도 2021년 부터  일용품 현장지급액  13만8600원이 지급되고  현역병도 이발비가 월 1만 원 추가 지급,  병 자기개발 활동비 추가 지원  등 되는 등 부수적인 금액도 추가됩니다.  실제 병 봉급 인상은 '21년에는 20년 대비 12.5%인상 하였고 22년까지는 최대 최저임금의 50%수준으

1895년 3월 3일 리지웨이 장군 출생

이미지
리지웨이 장군* 1895년 3월 3일 리지웨이 장군이 출생 했다. 6·25전쟁 중 수류탄을 항상 트레이드마크처럼 달고 다녔던 그에게 어느 기자가 물었다. “가슴에 달고 있는 수류탄은 패튼 장군의 진주 손잡이가 달린 권총처럼 멋있게 사진을 찍기 위한 쇼입니까?" 그러자 리지웨이는 “아닙니다. 이 수류탄은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공수사단을 이끌며 수류탄을 지닌 병사는 위기 상황에서 손쉽게 빠져나올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6·25전쟁에서도 결코 포로가 되거나 매복에 당하지 않겠다는 일념 으로 수류탄을 소지하고 다녔던 것이다.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며 전장을 수없이 누비고 다녔던 리지웨이 장군을 '뼛속까지 군인' 이라 평가했던 이유였다. 6·25전쟁이 발발 하자 그는 맥아더 장군의 부름을 받고 한국으로 달려왔다. 지프 전복 사고로 사망한 워커 장군을 대신해 급작스럽게 미8군 지휘권을 맡게 된 그는 부임과 동시에 맥아더 사령관에게 달려가 부대운용에 대한 전권을 받고 우수한 장교를 과감히 선발해 대대와 연대 지휘관의 소임을 맡겼다. 중공군의 2차 공세에 미군과 유엔군이 힘없이 철수하는 모습에 크게 분노한 그는 연합군의 패배의식을 극복하고 부대의 사기를 올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오직 승리뿐이라 여기고 공세적인 작전을 계획했다.  또한, 예하 지휘관들에게 “항상 전투가 가장 치열한 곳에 지휘관이 먼저 위치하라. "고 강조하면서 그 자신부터 최전선 참호에 수류탄을 달고 나타나 “오늘 밤만 더 버텨 달라."고 부하들을 격려하고 다녔다. 그의 이러한 리더십에 힘입어 국군과 유엔군은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중공군의 공세를 막아내고 38도 선까지 전선을 다시 북상시킬 수 있었다. 리지웨이 장군은 “지휘관이란 결정적인 시점에 전선에 위치해 통찰력을 바탕으로 즉각적인 대응을 지시할 수 있어야 하며, 장병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1233년 2월 26일, 몽골군이 금나라의 수도 카이펑(개봉)을 공성전 끝에 함락

이미지
공성전 1233년 2월 26일, 몽골군이 금나라의 수도 카이펑(개봉)을 함락 했다. 1206년 몽골을 통일한 칭기즈칸은 1211년 부족 최고회의에서 금나라 공격을 결정한다. 당시 금나라는 수도 연경(베이징)을 중심으로 세력을 키워 거란족의 요나라와 한족의 송나라를 굴복시킨 당대 최강의 국가였다. 몽골은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금나라 등 주변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풍족한 땅을 손에 넣을 필요가 있었기에 이 충돌은 예견된 것이었다. 칭기즈칸은 원정에 앞서 서하와 위구르 등 북방민족을 쳐서 후방의 위협을 제거했고 금나라가 성에 들어가 방어할 것이라는 정보를 확보한 뒤 이에 대비한 공성훈련과 전술 에 힘을 쏟았다. 수년간에 걸친 원정 준비가 완료되자 칭기즈칸은 최소한의 수비대만 남긴 채 전 병력을 이끌고 출정했다.  금나라는 수도를 카이펑으로 옮기고 연경에서 농성하였으나 몽골군의 집요한 공격 앞에 1214년 함락되고 말았다. 연경이 무너지자 대세가 몽골로 기울었음을 직감한 북방 여러 민족들이 금나라와 단절했고, 몽골군은 금 황제의 목마장을 습격하여 수십만 마리의 군마를 노획함으로써 전력을 더욱 크게 증강할 수 있었다. 다급해진 금나라는 엄 청난 배상금과 함께 화의를 제시 했고 공성전에서 확실한 성공을 보장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몽골도 이를 수용했다. 이후 휴식과 정비를 마친 몽골군은 1232년 4월 8일 조약 위반을 구실로 삼아 개봉을 다시 공격했고 당시 금나라 전역에서 모인 100여만 명이 총력을 다해 개봉성을 수비했지만 몽골군의 집요한 공성 전술 앞에 군량이 바닥나고 황제가 성을 버리자 결국 함락되고 말았다. 몽골군은 잘 알려진 대로 기병 중심의 군사조직 이었다. 압도적인 기동력으로 적을 집중공격하여 무너뜨리는 것이 강점이었지만 반대로 견고한 성이나 방어물을 잘 극복하지 못했다. 그러나 몽골은 자신들의약점을 빨리 인정하고 이를 보완하기 위해 이민족 군대와 전술을 적극 받아들였다. 정면돌파가 필요할 땐 퉁구스계 중장기

1978년 2월 20일 이집트 특수부대 '알 사이카'에서 777부대로 바꿔서도 실패한 이유

이미지
777부대 1978년 2월 20일 이집트 특수부대 '알 사이카'가 키프로스에서 대테러 작전 에 나섰다. 하지만 창설된 지 1년밖에 되지 않은 특수부대의 첫 실전은 시작부터 어긋나고 있었다. 이들을 태운 수송기가 사전 협조 없이 공항에 무단으로 착륙하자 키프로스군과 경찰이 사이카 부대를 테러범으로 오인하고 발포를 시작했던 것이다. 이 교전으로 부대원과 인질을 포함하여 15명이 사망 했으며 테러범들은 유유히 현장을 빠져나와 키프로스 군에 투항해 버렸다.  체면을 구긴 사이카 부대는 이후 777부대로 명칭을 바꾸고 미국 델타포스를 초청 하여 부대의 면모를 일신하려 애썼다. 그리고 실패를 설욕할 기회는 7년 만에 찾아왔다. 1985년 11월 23일, 110명을 태운 이집트 항공 소속 여객기가 몰타에서 테러리스트에게 납치당하는 사건 이 벌어진 것이다. 이번에는 몰타 정부로부터 작전 개시를 사전에 승인받고 현장에 도착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이들은 기체 내 테러리스트의 숫자와 위치, 항공기 내부구조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 하지만 자신감과 흥분에 들떠있던 지휘관은 기체 위로 올라가 폭약을 설치하고 내부로 진입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폭약량을 과도하게 계산하는 바람에 폭발과 함께 아래에 있던 수십 명의 승객이 즉사 하고 말았다. 게다가 폭발로 인해 시야가 흐려지자 90초 동안이나 대기하며 테러범들이 응전할 시간을 벌어주었다. 여기에 진입을 시작한 부대원들은 섬광탄 대신에 파편 수류탄을 던지는 실수를 저질렀으며 흥분한 상태로 기체 내에서 움직이는 모든 것에 총을 쏘아 수많은 인질을 죽이고 말았다. 이날의 참사로 사망자 57명을 포함해 90여 명이 죽거나 다쳤다 . 물론 여러 과장된 평가도 있는것도 사실입니다.  적군이든 아군이든 적군을 모두 파괘한다라는 부대로 알려진 777부대에 대한 사실은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여러가지 시사점을 가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777부대는 1차 키프로

1921년 2월 16일, 독립운동가 양근환 선생에 의해 친일파 민원식 처단

이미지
독립운동가 양근환 선생 1921년 2월 16일, 독립운동가 양근환 선생에 의해 친일파 민원식이 처단 됐다. 민원식은 친일세력 육성에 앞장서던 단체인 '국민협회'의 회장으로 조선인 참정권을 요구하며 도쿄를 방문하던 중이었다. 국민협회는 조선총독부의 후원을 받아 참정권 운동에 앞장 섰는데, 사실 이는조선인들에게 독립운동이나 민족사상, 조선어까지 완전히 포기하고 일본의 충실한 신민 이 되라는 의미였다. 당시 일본에 있던 양근환 선생은 이를 듣고 매우 분개하였고 청원서를 들고 도쿄로 건너온 민원식을 직접 처단하기로 결심했다. 거사 당일, 양근환 선생은 민원식이 묵고 있던 제국호텔로 직접 찾아가 면담 을 신청했다. 그리고 “그대와 같은 자야말로 민족을 배반하는 자이다."라며 참정권 운동의 허구성과 친일 매국행위를 질책한 뒤 품고 있던 단도로 민원식을 처단 했다. 일본 신문은 이를 대서특필했다. 양근환 선생은 현장에서 피신했으나 8일 뒤 나가사키 항구에서 상하이로 가는 배에 타려다 경찰에 붙잡혔고, 재판에서 무기징역을 언도 받아 도쿄형무소에 투옥되었다. 당시 선생의 나이 28세였다. 이후 선생은 일본 각지 형무소를 전전하다 1933년이 되어서야 석방되었다. 광복 후에는 반공 투쟁에 앞장서기도 했으나 6-25 전쟁 중 북한군에 납치되어 처형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기려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양근환 선생은 낮에는 국수장사를 하고 밤에는 인력거를 끌며 고학하면서 어렵게 가족을 부양하던 평범한 사람 이었다. 그러나 늘 조국독립을 향한 큰 뜻을 품고 살았다. 호송될 당시 선생은 "나는 학문도 정식 교육도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론으로는 일본인에게 지지 않는다 (중략) 조국의 독립은 누구든지 희망하는 것이다."라고 했는데 여기에서도 그의 독립을 위한 굳은 심지를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수감되고 난 뒤, 서울에서 노모와 함께 지내던 양근환 선생의 어린 딸이

1952년 2월 6일,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즉위

이미지
엘리자베스 2세 1952년 2월 6일,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즉위 하였다. 1926년 4월 21일 런던에서 태어난 이왕은 2020년 영국 역사상 가장 장수한 군주이자 가장 긴 재위 기간 을 가지고 있다. 1939년, 엘리자베스 2세가 열세 살이 되던 해에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프랑스 전역을 석권한 나치 독일은 막대한 공군력을 투입하여 영국을 위협했지만, 어머니 엘리자베스 여왕은 어린 엘리자베스 2세를 국외로 피난시키지 않고 끝까지 남게 함으로써 왕실의 모범을 보였다.  어머니의 이러한 결단과 언행을 보고 자란 엘리자베스 2세 역시 18살이 되면서부터 아버지(조지 6세)에게 군에 입대 해 최전선에서 싸울 기회를 달라고 고집을부렸고 우여곡절 끝에 소위 계급으로 참전하여 군수품 운반 트럭을 모는 임무 를 맡게 된다. 그녀는 다른 장병들과 똑같은 군복을 입고 무거운 탄약을 날랐으며, 차가 고장 나면 먼지와 기름때를 뒤집어쓰고 차량을 수리했다. 이로써 영국 왕실이 참전을 통해 국가에 봉사해온 역사 는 조지 6세(제1차 세계대전, 해군)로부터 계속해서 이어질 수 있었고, 장남인 찰스 왕세자(해군 장교), 둘째 앤드루 왕자(헬기 조종사), 셋째 에드워드(해병대 장교), 그리고 그의 손자 윌리엄(헬기 조종사)과 해리 왕자(아프간 파병, 전투소대장)가 왕실의 전통을 지켜오고 있다. 그리고 영국은 왕실을 중심으로 두 차례의 세계대전 속에서도 굳건히 나라를 보전했으며 엘리자베스 2세는 영국인들에게 '마음의 여왕'(Queen of Heart) 이 될 수 있었다. 영국은 일찍이 1625년 청교도 혁명을 통해 찰스 1세를 몰아냈고 명예혁명을 통해서 제임스 2세를 축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영국인들은 왕을 인정하고 그 권위에 대해 존경을 표하고 있다. 장래 여왕의 자리에 오르게 될 후계자가 국난에 맞서 자발적으로 국가 에 헌신하고자 했던 마음 이 국민의 마음에 닿아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금

1923년 1월 22일, 의열단 단원 독립운동가 김상옥 선생 서거

이미지
독립운동가 김상옥 선생 1923년 1월 22일, 의열단 단원 김상옥 선생이 세상을 떠났다. 열흘 전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의거를 결행한 후 선생은 용산에 있는 매부 고봉근의 집에 몸을 감추었으나 밀고로 인해 은신처가 발각되었고 1월 17일, 무장한 일본 순사 14명에게 완전히 포위당했다. 이에 선생은 뛰어난 사격 솜씨와 대범함으로 이들의 추적을 따돌린 후 눈 덮인 남산을 맨발로 넘어 왕십리 인근 이혜수의 집으로 은거지를 옮겼다. 그러나 이마저 일본에 탐지되어 이번에는 4백여 명의 무장경찰이 은신처를 겹겹이 포위 하기에 이르렀다. 선생은 양손에 권총을 들고 인근 가옥 지붕을 넘나들며 일경과 3시간여의 치열한 접전을 벌여 수 명을 사살하고 다수에게 중상을 입혔지만 안타깝게도 총알이 떨어지고 말았다. 이에 김상옥 선생은 마지막 탄환이 든 권총을 머리에 대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자결 순국 하였다. 그의 나이 34세였다. 상하이를 떠나 면서 남겼다는 "나의 생사가 이번 거사에 달렸소, 만약 실패하면 내세에 만납시다. 나는 자결하여 뜻을 지킬지언정 적의 포로가 되지는 않겠소."라는 그의 결의를 따랐던 것이다. 동아일보는 이 의거를 기사에 올리며 “오른손을 이미 못 쓰는 상태에서 죽는 순간까지 둘째 손가락을 방아쇠에 걸고 권총을 힘있게 잡고 있었다." 라고 했다. 일본 경찰들은 자결한 김 의사가 혹시 살아 있을까 두려워 감히 다가가지 못했고 김 의사의 어머니를 보내 생사를 확인하게 했다. 가족들이 그의 시신을 수습할 때 그의 몸에 11발의 총상 이 남아있었다고 하니 10발의 총알을 맞으면서도 수백의 일경에 맞서 세시간을 버틴 김상옥 의사를 초인으로 생각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선생의 강한 정신력과 결기 넘치는 의거는 우리 민족의 저항정신을 되살렸고 이후 펼쳐지는 항일 투쟁의 발판이 되었다는 역사적 평가를 받고 있다. 독립운동을 다룬 영화 '암살'의 등장인물 '하와

2011년 1월 21일 삼호주얼리호 선원을 구출한 아덴만 여명작전

이미지
아덴만 여명작전 2011년 1월 21일은 대한민국 해군이 소말리아 해적들에게 납치된 삼호주얼리호의 선원들을 구출한 날이다. 이란의 하르크 섬에서 화물을 싣고 스리랑카로 항해하던 삼호주얼리호는 2011년 1월 15일 인도양 공해상에서 해적들에게 납치되었는데, 당시 배에는 한국인 8명을 포함해 21명의 선원이 타고 있었다. 삼호주얼리호의 피랍 사실을 인지한 대한민국 해군은 청해부대 최영함을 출동시켰고, 1월 18일 1차 구출 작전을 시도했지만 피해자가 발생할 위험이 높아 작전을 중지하고 물러났다. 그리고 계속해서 배를 쫓아 기회를 엿보던 청해부대는 드디어 1월 21일 5시 29분, '아덴만 여명작전'이라고 명명한 2차 구출작전을 단행 하였다. 탑재된 링스헬기와 최영함의 기관총 사격이 적을 제압하며 시선을 끄는 사이, 선박 침투에 성공한 공격조가 신속히 선실에 돌입해 작전을 펼쳤다. 그리고 단 한 명의 작전 요원 손실 없이 피랍된 선원 21명을 구출 하고 삼호주얼리호를 되찾았다. 격실에 숨어있던 잔여 해적까지 모두 소탕한 9시 56분 아덴만 여명작전은 성공적으로 종료 되었다. 위의 기사 사진은 아덴만 여명작전의 흐름을 보여주는데 우리나라 최영함과 작전에 투입된 주요 무기 등에 대해서 보여준다. 아덴만 여명작전은 우리 군이 해외에서 인질로 잡힌 국민을 교전끝에 구출한 최초의 사례 이자 세계적으로도 피랍 상선을 군사작전으로 구출한 다섯 번째 사례였다. 이 작전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무사히 지켜낸 대한민국 해군의 역사적 쾌거로 평가받고 있다. 머나먼 땅에서 국제평화를 위해 노력하는 파병부대원들의 변치 않는 활약 을 기대하며 국민들이 원하는 군 본연의 임무가 무엇인지 알수 있는 사건이다. 

1991년 1월 17일 사막의 폭풍(Desert Storm) 작전

이미지
사막의 폭풍작전 1991년 1월 17일, '사막의 폭풍(Desert Storm) '이라는 작전명 아래 이라크 바그다드 공습이 시작됐다. 걸프전의 발발이었다. 이 전쟁은 이라크가 석유 과잉공급과 관련해 갈등을 빚어오던 쿠웨이트를 기습 침공, 점령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은 유엔안보리를 통해 이라크를 침략자로 규정하며 쿠웨이트로부터 즉각 철수할것을 촉구하였고, 1월 15일까지 철군하지 않을 경우 무력을 사용할것임을 경고했다. 그러나 이라크는 이를 거부하였고, 철수기한 이틀뒤, 공습이 시작되었다.  미국이 주도하는 다국적군은 최첨단 무기들을 대거 동원하여 군사 강국이던 이라크를 완전히 압도 했다. 6주간 지속된 이 작전에서 다국적군은 1천여 시간의 공중폭격과 이후 불과 1백시간의 지상작전을 통해 이라크의 항복을 받아냈다. 이라크 공화국수비대는 42개 사단 중 무려 41개 사단이 궤멸 되었으며 민간인 피해자를 포함하여 최대 15만 명에 가까운 희생자를 냈다. 이에 반해 다국제군의 피해는 126명에 불과했다. 세부사항은 아래내용을 더 참고해 주세요 걸프전은 이전까지 치러진 전쟁의 양상과는 확연히 달랐다. 가히 전쟁의 개념을 바꿀만한 현대전의 정접에 선 전쟁이었다. 스텔스기를 비롯한 각종 하이테크 무기들은 가공할 만한 정밀타격 능력을 보여주었다. 놀라운 것은 무기시스템 뿐만이 아니었다. 지상군의 바그다드 진격시에는 '가용부대를 축차 투입하지 말라', '공격 축선은 최소화 하라'는 등 작전의 불문율을 깨뜨린 창의적인 계획들이 실현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전장의 모습들이 실시간 중계되며 전 세계인에게 놀라움과 충격을 전해주었다.  베트남 전쟁 이후 15년간 미국의 깊은 반성과 연구가 이뤄낸 전쟁수행방식의 혁신 이었다. 전쟁의 승리는 대적 필승의 정신력과 함께 기술적, 전략·전술적 우위를 점한 측이 쟁취하게 된다. 현대전을 비롯하여 미래 전

1951년 1월 15일 빨간마후라의 배경 승호리철교 폭파작전

이미지
 승호리 철교 폭파작전 1951년 1월 15일 은 대한민국 공군이 6·25전쟁 당시 적의 주 보급로였던 승호리철교 폭파작전을 완수한 날 이다. 실제 '빨간 마후라'라는 영화는 승호리 전투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로 많이 알려져 있다. 1950년 12월 38도선 인근에서 남북 간의 전선이 고착된 가운데, 유엔군 지도부는 휴전회담의 성과를 진전시키기 위해 제공권을 장악하고 있던 공군을 통해 전황 타개 에 나섰다.  미 공군은 적의 주 보급로였던 승호리철교의 전략적 가치를 파악하고 철교 폭파 작전을 감행 하였다. 그러나 북한군은 폭파된 철교의 200m 하류 지점에 새로운 철교를 가설한 후 더욱 밀집된 대공포화망을 구축하고 다리를 보호하였다. 미 공군은 재가설된 두 번째 철교를 폭파하기 위해 공격을 집중하였으나, 북한군의 대공포화를 뚫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때 대한민국 공군에 그 임무가 주어졌고, 우리 공군은 작전을 반드시 성공시키겠다는 일념으로 적의 대공포화의 위협을 감수하고 '4,000ft 고도에서 강하하여 1,500ft에서 폭탄을 투하하는 저고도 공격방법'을 감행 하기로 결심했다. 기존 8,000ft 고도에서 강하하여 3,000ft 고도에서 폭탄을 투하하는 전술에 비해 무모할 정도로 위험한 방법이었지만, 1월 15일 대한민국 공군 6명의 조종사들은 결전을 각오하고 출격해 빗발치는 적의 공격을 뚫고 두 번째 승호리철교를 완전히 폭파시켰다. 경험 많은 미 공군조차 성공하지 못했던 임무를 우리 군이 완수할 수 있었던 것은 대한민국 공군의 명예를 걸고 기필코 성공해야겠다는 전투 조종사들의 구국일념에 기인 한 것이었다. 단독 출격한 지 3개월만에 거둔 값진 전과는 선배 전우들의 남다른 노력과 용기를 함께 증명해 주었다.

1959년 1월 14일 북한 노동적위군 창설

이미지
 노농적위군 1959년 1월 14일 북한 로동적위대가 창설 되었다. 노동적위대는  북한 최초의 민간군사 조직 으로 북한은 6.25전쟁에 참여했던 중공군이 1958년부터 철수함에 따라 병력 부족을 보충하기 위해 중공의 민병조직을 참고하여 노동자, 농민, 제대군인, 학생 등 약 50만 명으로 창설했다. 1962년에는 전인민무장화 정책에 따라 18~45세의 남자와 18~35세의 미혼여성까지 편입 시켰으며, 1971년에는 로동적위대의 해당 연령을 50세로 연장하고, 17~60세의 남자와 미혼여성 가운데 조선인민군과 교도대에 편입되지 않은 모든 주민을 포함시켜 규모를 확대 했다. 이후 김정은이 후계자로서 본격적으로 군을 장악한 것으로 알려진 2010년 당 창건 65주년 열병식에서는 ‘노농적위군'으로 명칭을 변경 했다 . 노농적위군은 지역방위와 전투예비대 임무 를 수행하며 군복과 AK소총을 지급 받고 연간 500시간의 교육 훈련을 실시한다.  북한은 2019년 동계 훈련시 예년과 같은 시범 위주의 훈련에서 벗어나 실전을 가정한 전투훈련과 평가 를 실시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은 노농적위군을 비롯하여 교도대, 붉은청년근위대 등 거의 모든 사회조직원을 규합하여 세계 1위 규모의 예비전력을 확보 하고 이의 정예화도 꾀하고 있다. 대한민국 예비군은 북한이 1.21사태를 일으켜 남북관계가 악화 일로로 치닫던 1968년 4월 1일 창설되어 오늘에이르고 있다.  반백 년의 역사를 간직한 예비군의 정신은 국가와 지역 사회를 위한 희생과 헌신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병역자원 감소로 인해 예비전력의 수 또한 축소될 수밖에 없는 현실과 여건을 감안해 볼때, '일당백'의 능력을 갖춘 예비전력 정예화 에 더 많은 관심과 지지가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