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1월 2일 뤼순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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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1월 2일 러일전쟁 중 가장 치열했던 뤼순전투가 러시아군의 항복으로 종결되었다. 전투 초기 일본군은 청일전쟁 당시 하루 만에 뤼순항을 점령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손쉬운 승리를 점치고 있었지만, 방어에 나선 러시아군은 콘크리트 진지 구축과 함께 해안포와 요새화된 진지들이 상호 지원이 기능하도록 만반의 방어 준비를 완료한 상태였다.
일본군 지휘부는 적에 대한 정확한 정보도 확보하지 못한 상태였지만 무모한 돌격을 계속했다, 당시 노기 마레스게 사령관은 전생은 '정신과 기합의 씨음'이라는 옛 사무라이 돌격정신의 신봉자였고 참모장이었던 이지지 고스케 소장 또한 26이 짝수로서 운이 좋은 숫자이고 나누면 13으로 반 토막 나듯이 뤼순 요새도 이날 공격하면 반 토막 낼 수 있다는 근거 없는 미신으로 매달 26일마다 대공세를 반복했다.
그렇게 일본군은 예정 날씨를 기해 착검돌격을 고집하며 수만 명의 전사자를 내었고 특히 203고지 작전에서는 1만 6,000여 명이라는 엄정난 희생이 발생했다. 엄청난 피해에 당황한 일본군부는 부랴부랴 무능한 노기 장군을 해임하고 고다마 겐타로를 새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겐타로 장군은 기존의 착검돌격 대신 포격전 위주의 전법을 구사해 6개월간 끌었던 뤼순전투를 불과 5시간 만에 끝내고 목표를 점령했다.
당시 일본군의 막대한 희생은 전투양상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수뇌부의 책임이 컸다. 아이러니한 것은 미신의 신봉자 이치지 고스케 참모장은 독일에서 유학까지 마치고 온 엘리트 중의 엘리트 장교였다는 것이다. 지휘관의 자기 과신이 불러온 참사로밖에 볼 수 없는 결과였다. 일본군의 무능하고 비과학적인 전투사례를 보며 지휘관의 지혜와 역량의 중요성을 새삼 되새겨 볼 수 있는 전투 사례이다.